Statement

2012  유아트스페이스 공모전 '낯선 휴식'-----------------------------------------------------------------------------------------------------------

일탈의 혼종공간에서의 낮선 휴식


최광진(미술평론가)



우리가 일상에서 일탈을 꿈꾸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이 편안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회 환경에 자신을 짜 맞추어야 하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열등감과 피해의식, 그리고 후회와 원망 등으로 우리의 마음은 잠시도 편안하게 쉴 틈이 없다. 게다가 살아오면서 생긴 크고 작은 정신적 트라우마와 초자아가 만들어내는 강박적인 의식은 스스로를 자책하게 하고 자아를 위축시킨다. 이러한 정신적 병리현상은 도시문명이 발달된 현대사회로 올수록 심화되고 있고, 이것은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우울증공화국의 심각한 사회적 현상이다. 사회조직이 거대해지고 물질문명이 발달되었지만, 상대적으로 개인의 자아는 억압되고 위축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초조와 불안은 현대사회가 개인에게 필연적으로 부여한 무거운 짐일지도 모른다. 차소림의 작업은 사회 속에 던져진 자신의 내면을 지켜보고, 의식의 흐름을 섬세하게 포착하려 한다는 점에서 정신분석적이다. 의식은 불편하고 기억하기 싫은 것들을 무의식으로 밀어내고 눌러버리는 속성이 있다. 그러면 해소되지 못한 의식의 찌꺼기들이 무의식에 자리하며 현실의식을 교란시키게 된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자동기술법과 데페이즈망 같은 방식을 통해 무의식의 어두운 세계를 밖으로 표출하고자 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모호한 구름처럼 존재하는 무의식은 포착 자체가 쉽지 않고, 포착이 되더라도 노출시키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막연하고 모호하게 존재하는 무의식을 어떻게 승화시켜 건강한 자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차소림은 무의식의 존재가 모호한 증상으로 드러나는 불안의 감정을 관조하며 그 가능성을 찾는다. 특정한 위협을 직접적으로 인지하는 공포와 달리 불안은 특정한 대상 없이 막연한 위험에 대하여 반응하는 심리현상으로 무의식과 관련이 깊다. 무의식에 저장된 과거의 크고 작은 트라우마들이 현재의 의식과 중첩되면 주체는 현재로의 몰입을 방해받게 되고, 미래의 자유로운 가능성들을 차단당한다. 불안은 실제라기보다는 심리적인 현상에 불과하지만, 의식의 판단작용을 지배하고 현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그리고 현실에 의해 다시 무의식이 만들어지면서 심리적 실재와 물리적 실재가 뫼비우스 띠처럼 물고물리는 관계가 형성된다. 차소림은 이처럼 주체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육체, 그리고 주체와 타자 사이의 유기적 상호작용에 관심을 갖고, 그 메커니즘을 드러내고자 한다.

“무의식을 타고 꿈속에 등장하여 의식의 표면에 자리하고, 의식은 이미지를 다시 만나 또 다른 기억으로 자리한다. 무의식은 몸에 증상을 남기고 우리는 증상을 통해 신체에 각인된 흔적을 찾는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되는 복잡한 그물망은 우리의 의식에 그리고 무의식에 그리고 신체에 그리고 사회와 환경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작가노트)

그가 작품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객관적 대상이나 주관적인 심리, 혹은 자신의 환상 그 자체가 아니라, 이들이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은 메커니즘 그 자체이다. 그것은 현실에서처럼 의식이 무의식을 억압하거나 초현실주의자들처럼 의식을 억제하여 무의식을 전면에 드러내는 방식과는 다르게 고착되고 경직되어 있는 정신의 흐름을 원활하게 순환시키는 방식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감정의 영역과 환상의 영역, 그리고 현실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현실과 꿈, 그리고 내면의 감정이 섞인 새로운 혼종공간을 만들어 낸다. 그렇게 만들어진 혼종의 공간은 허구라고 하기에는 사실적이고, 현실이라고 보기에는 이질적인 공간이다. 이러한 모호함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지만, 이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통합적 실재에 가깝다.

자연과 가까운 건강한 정신은 물 흐르듯이 고착되지 않고 흐르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집착과 심리적 트라우마는 이러한 자연스런 흐름을 붙잡아서 딱딱하게 경직시켜 버린다. 그의 작업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가로 막혀 있는 창문을 열어 밀폐된 공기를 환기시킴으로써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에서 쌍방향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분화된 정신의 통합을 꿈꾼다. 이는 삶의 현실에서 비롯된 파편화된 의식에 연속성을 부여하며, 정신의 유기적 일원성을 성취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그의 작업은 세 가지 차원의 요소들이 순환과정을 거치며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현실의식의 차원으로 사람이나 집, 하늘과 땅 등 자신의 주변에서 얻은 시각적 이미지들로서 그가 보고 딛고 사는 3차원의 세계이다. 그리고 현실은 곧 무의식적인 환상의 차원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꿈과 같이 자동기술적인 연상법에 의해 우연스럽게 포착된 4차원의 공간을 연출한다. 여기서 덧붙여지는 또 다른 요소는 내면적인 감정의 차원이다. 이것은 몰입의 상태에서 마음과 손의 일치에서 나오는 예상치 않은 즉흥적이고 표현적인 선묘로서 2차원의 공간을 만든다. 결과적으로 화면은 2차원과 3차원, 그리고 4차원의 공간이 섞이면서 혼종공간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정신의 자발성에 나오는 자연스런 흐름을 따른 결과이다. 그리고 각 차원은 각각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필연적 인과관계로 얽혀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결되어 있다.

2년 전에 열렸던 금호미술관 개인전에서 선보인 <다층적 실재>시리즈는 3차원과 4차원의 비중이 높았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낮선 휴식>시리즈에서는 빠르게 그어지는 일필의 선묘 속에 자신의 감정을 시원하게 분출시킴으로써 2차원적인 선묘가 보다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과거 그의 깨알 같은 개미 작업을 아는 사람에게 매우 큰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가 자기 식으로 정착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좀 필요해보이지만,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 있어서의 어떤 변화를 짐작케 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이는 상대를 의식하여 자신의 감정표현을 지나치게 억압하고 절제했던 과거의 생활방식에서 벗어나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이러한 변화는 자아의 정신건강을 위해 진일보된 모습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작품의 양식적 진폭은 크지만, 작품의 주제에 있어서는 일관성이 이어지고 있다. 단지 최근 작품들은 과거에 비해 운명론적인 수동성에서 벗어나 객관화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과거 작품들은 몸에 박힌 가시나 총알처럼 치유될 수 없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가령, 나무에 지퍼나 못을 박은 작업이나, 해독이 불가능한 문자를 캔버스에 깨알 같이 빼곡하게 채우는 작업들은 소통되고 해소되지 못한 심리적 상태를 양식화한 것이었다. 또 2010년경부터 시도된 부서지기 쉬운 석고를 깎고 갈아서 부서진 글자 모양의 형태를 만들거나 그것을 이미지화하는 작업도 녹여낼 수 없는 각인된 언어에 파편을 양식화한 것이다. 이러한 운명론적 소극성이 이제 적극적인 표현과 거시적인 순환을 지켜보는 자로 변모하고 있는 점은 정서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변모라고 생각된다.

최근 표현적 측면이 올라오면서 개념적으로 주체의 내면을 구성하는 현실과 환상과 감정이라는 3자 관계가 보다 명확해졌다. 이 3자 관계 속에서 그는 우연과 필연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화면들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주체 안에서 일어나는 이 순환작용을 살펴봄으로써 그는 자신의 현실과 환상과 감정 모두를 바라로는 관조자의 위치에 서고자 한다. 그러면 내면의 불안과 자신을 짓누르는 무의식적 억압에서 벗어나 낮선 곳을 찾아가는 여행자처럼 일탈의 해방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로운 환경과 공간에 처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사유가 닫히고 감각을 열게 된다. 그러면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있는 강박적인 집착과 편견을 일시적으로 내려놓게 되면서 잠시 동안 삶에 지친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다. 즉 감각적 몰입이 불편하고 불행한 과거와의 연결망을 차단시켜 우리에게 정신적 휴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행은 새로운 공간과 낮선 환경이 제공하는 일시적인 휴식인 셈이다. 그러나 환경과 익숙해지고 적응이 끝나면 다시 감각이 닫히고 고통스런 사유가 시작된다.
그의 근작들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은 낮선 공간에서 감각을 열어 작은 만남을 시도하는 있는 자신의 분신 같은 존재들로 보인다. 그 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물끄러미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뭔가를 만지면서 주변 환경과 관계 맺기를 시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들은 거창한 일을 하고 있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 의식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유아들이 자신의 감각을 작동시켜 주변의 소소한 것들과 끊임없이 관계 맺기를 시도하듯이, 신체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 유아들에게 세계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언어를 익히고 이성이 발달한 성인들은 감각을 스스로 차단하여 세계로부터 분리되고 만다. 특히 심리적 불안이 심하고 생활에 쫓길수록 감각이 닫히고 소외감이 커지게 된다. 유아처럼 목적 없이 소소한 것들에 관계 맺는 행위는 심리적 불안을 해소하고 감각을 작동시켜 잠시나마 정신적 휴식의 상태에 이르는 하나의 방편이다.

또한 어린 시절에 즐겨 했던 놀이는 그에게 부조리한 현실에서 비롯된 강박적 불안을 희극적으로 승화시키는 장치로 채택되고 있다. 특히 최근 시도하고 있는 사진 작업들은 유아들의 인형놀이를 연상케 하는 작업이다. 그는 평소 주변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나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어 스티커로 제작하거나 출력하여 현실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 놓은 석고 조각이나 그려 놓은 드로잉이나 그림과 재배치하면서 현실과 상상도 아닌 공간을 창출하고, 그것을 다시 사진으로 옮긴다. 생활에서 생긴 다양한 감정의 파편들은 놀이의 도구이자 작품의 소재가 된다. 놀이는 감정이입을 통해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데 효율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삶의 불행과 심리적 불안을 유아적 순진함으로 변모시켜 신나고 긍정적인 감정으로 승화시키는 효율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각인된 트라우마 이전의 자아의 유아적 천진성을 복원하는 것, 이것이 그가 작품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예술적 성취일 것이다.


2010  '언어의 저편' 금호 미술관 개인전-----------------------------------------------------------------------------------------------------------


‘기호의 제국’으로부터의 ‘소외’

최광진(미술평론가)


기호의 한계와 딜레마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자연이나 타인들과 끊임없는 교류와 소통을 통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소통이 원활할 때 우리는 일체감과 편안함을 느끼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소외감과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차소림의 작품을 관류하는 일관된 주제는 소통의 부재에서 피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인간 소외의 문제이다. 그는 이 소외의 원인을 기호나 언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한다. 신으로부터 이성(理性)을 부여받은 인간은 타자와 소통을 위해 언어나 기호를 만들었지만, 이것이 실재를 왜곡함으로써 완전한 소통은 오히려 왜곡되고 만다. 실재는 역동적으로 변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이기에 이를 단순하게 고정시켜 버리는 순간 소외를 피할 수 없다. 기호는 실재의 자기소외로서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기호의 한계와 딜레마를 직시하고 실재의 찌꺼기 같은 기호 너머의 다차원적 실재를 형상화하고자 한다. 그에게 언어는 실재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무기가 되어 자신에게 상처를 남기는 도구이다. 그는 “타인의 말이 가시가 되어 가슴을 뚫고 들어와 심장에 상처를 주며 각인되면, 나는 내 안에 천연스럽게 자리한 타자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이렇게 신체 어딘가에 각인된 언어는 정신을 분열시키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들지만, 이미 내 몸의 일부가 되어 쉽게 제거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치유의 의식(儀式)으로서의 작업
그는 두꺼운 나무판에다가 지퍼나 못을 빼곡히 박는 작업을 한동안 한 적이 있다. 이것은 내 몸(나무판) 안에 마치 총알의 파편처럼 각인된 타자들(지퍼)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양식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불투명한 에폭시를 덮어 마치 상처에 새살이 돋아난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나무를 붕대로 감아 상처가 치유되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그 후 이러한 조형작업은 평면으로 옮겨지면서 캔버스에 깨알 같은 문자모양을 각인시켰다. 그것들을 자세히 보면, 문자가 아니라 판박이를 한 지퍼 문양이나 실로 꿰맨 바늘땀으로 제법 텍스트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개미떼처럼 보이는 이러한 텍스트는 신의 감추어진 코드처럼 해독 불가능한 언어이다. 이 불가능해 보이는 해독에 도전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그는 작업에 많은 노동과 시간을 할애한다. 이러한 작업행위는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마치 경건한 예배의식처럼 정갈한 양식적 완벽성을 통해 자신의 내적 불안을 잠재우고 상처를 치유하려는 일종의 종교 의식(儀式)과 유사해 보인다. 그의 작업방식은 자신의 소외된 감정과 갈등에서 출발하여 작업의 행위를 통해 치유의 과정을 드러내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이번에 선보이는 근작들은 양식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감지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언어 기호와 소통에 관한 관심사가 일관되게 이어지고 있다. 과거 지퍼문양의 판박이를 통해 깨알같이 각인되었던 문자 형태는 이제 커다란 기호모양으로 변하여 초현실적인 낮선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문자 형태를 닮은 이러한 기호들은 막연한 상상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가 직접 깎은 하얀 석고를 임의적으로 배치하여 사진을 찍고, 그것을 다시 유화로 그린 것이다. 
그가 굳이 부러지기 쉬운 석고를 재료로 하여 예리한 각도로 갈고 깎는 고행을 거치면서 유사 문자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소 불필요해 보이는 이러한 행위를 통해서 그는 자신의 내적 상처와 불안한 심리를 정화시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석고를 깎는 행위 역시 치유를 위한 경건한 의식과 다름 아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작은 석고는 다시 캔버스 화면에 커다랗게 옮겨져 ‘기호의 제국’을 건설하는데 이용되기도 하고, FRP로 제작한 입체물로 빠져나와 공간을 구성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이렇게 구성된 기호적 공간은 의미론적으로 시베리아 벌판같이 황량하고 언어와 제도 같은 상징계로 찌든 오늘날의 현대사회를 은유적으로 암시한다.   

현실과 초현실의 사이에서
다소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낮선 공간에 그는 매우 리얼한 현대인의 모습을 등장시킨다. 현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잡지에 나온 인물사진이나 자신이 주변에서 카메라로 찍은 사람들을 토대로 하여 인물 스티커를 제작하고 그들을 자신이 구성한 화면 공간 속에서 떠돌게 하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어정쩡한 포즈와 무의식적인 몸짓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만지면서 주어진 환경과 소통하고자 한다. 그러나 소통은 요원해보이고 고독의 그림자만 넘실거린다. 간혹 등장하는 피에로나 운동선수들의 역동적인 자세에서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가 엿보이지만, 이들 역시 공허해보이고 고독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인간상들은 상징계로 물든 기호의 제국에서 목적의식을 상실하고 소외되어 방황하는 현대인들의 초상처럼 보인다. 
이처럼 알 수 없는 기호들로 구성된 초현실적 공간과 일상의 현실적인 인물들이 어우러진 화면은 차소림의 독특한 조형어법으로 초현실주의와 팝적인 리얼리즘의 대립을 화해시키며 다차원적 공간을 열어 보이고 있다. 그는 살바도르 달리처럼 너무 쉽게 현실을 뛰어 넘지 않고, 앤디 워홀처럼 상상력을 제거하고 주제를 일상자체로 묶어 놓으려 하지도 않는다. 이 지점이 그의 독특한 공간개념이다. 
미술의 역사를 보면, 공간개념은 주요한 시대정신이 되어왔다. 모더니즘은 르네상스 이후 확립된 3차원적 공간을 2차원(평면)으로 전환한 것이고, 초현실주의에서는 4차원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차소림의 공간개념은 현실적인 3차원과 초현실인 4차원이 혼합되어 교묘하게 3.5차원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공간은 현실과 기억, 상상계와 상징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우연과 필연, 의식과 무의식 같은 존재의 양면성을 넘나들면서 기호너머의 진정한 실재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장점으로 작용한다. 또한 평면 작업을 하면서도 석고 조각과 스티커 작업을 동시에 이용하기 때문에 화면이 공감각적으로 보이는 것도 그의 회화를 독특하고 매혹적으로 만드는 요인이다.  
    
절대를 향한 그리움  
차소림은 정서적으로 흰색을 매우 좋아하여 자신의 주변을 흰색으로 바꿔 놓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곤 한다. 때문에 그의 작품 역시 언제나 흰색의 아우라가 화면을 지배한다. 칸딘스키가 탐구한대로 흰색은 물질적 속성이 사라진 절대적이고 완벽한 침묵의 색이고,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색이다. 매사에 완벽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차소림도 흰색을 모든 현실의 갈등과 문제들을 해소하고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할 이데아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그의 작품에서 흰색은 차갑거나 창백하지 않고 어머니의 품속처럼 따스하다. 또 흰색에 수많은 색들이 녹아 있어 다양하고 풍요롭다. 그는 다채로운 원색들에서 출발하여 이들을 발효시키고 절제시켜 흰색에 이르는 과정을 드러내 보여준다. 그래서 다양함과 풍요로움을 간직한 단순함, 이것은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격조의 세계이자 전통적인 백자의 미학이기도하다. 김환기가 한국미의 전형으로 주목한 백자의 달항아리는 따스한 체온이 느껴지는 미묘하고 다양한 흰색과 고요한 움직임으로 불가사의한 미를 구현한 한국적 미니멀리즘의 모태이다. 
차소림은 이러한 한국 특유의 백자의 미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면서 언어와 기호에 의해 파생된 포스트모던 사회의 인간소외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미니멀리즘의 정신성과 표현주의의 심리성, 그리고 팝아트의 일상성을 넘나들고 종합하며 그는 기호와 언어 같은 상징계에 의해 소외받고,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도구적인 이성으로 비롯된 현대인의 상처들을 드러내고 보듬는다. 그리고 이를 하얗게 표백하고 정화시켜가는 행위를 통해서 절대자를 향한 그리움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맹목적인 해체나 아방가르드를 위한 미술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로서의 미술을 제안하는 것이다.    





2006 'decode' 두루 갤러리 개인전---------------------------------------------------------------------------------------------------------------



차소림이 기록해 나가는 초월과 계시로부터의 텍스트

심 상용(미술사학 박사, 동덕여대교수)



‘신의 죽음 ’과 ‘초월성의 소멸’ 속에서, 그러니까 (시어도어 로작Theodore Roszac의 표현을 빌자면) ‘세계의 코카콜라 식민지화’, 또는 '과학적 세계관의 밀실 공포증‘과 ’온갖 종류의 환원론적 오만’이 범람한 이후, 당연하게도 인간의 영혼은 오갈 곳이 없어졌다. “객관적 과학이 성취한 물질로 가득한 세계는 인간의 영혼이 머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기 때문이다.”(존 스토트,John Stotte)
그 결과 이 이 시대는 놀라울 정도로 초월성의 회복에 집착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환각을 일으키는 약물과 뉴에이지(new age)의 소위 ‘고차원적 의식’이라는 것들이 그 어느 시대보다 널리 퍼져나가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공상과학과 요가, 극단적인 예술의 지류들, 그리고 말콤 머거리지가 유물론자의 유일한 신비라고 부른 섹스 등, 온갖 종류의 수단을 동원해 절박하게 초월성을 갈망하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인 것이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Peter Berger를 따르면, 현대사회에 나타나는 온갖 종류의 신비주의적 경향은 “근대의식이 초월성을 억압한 결과‘에 다름 아니다.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초월성을 향한 열망과 모색은 차소림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핵적인 단초다. 작가는 자신을 신의 계시를 찾아 나선 한 작은 영혼의 탐험가로 소개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작은 탐험은 초월성으로부터의 어떤 부름을 담은 기호, 문자, 텍스트들-대부분은 성경으로부터 기인한 것들인- 을 추구하고 따르는 과정으로 시각화된다.
“나에게 다가오는 글의 이미지는 신의 메시지를 닮아있었고, 메시지의 내용을 찾아가는 나의 모습을 개미에 비유하여 한 화면에 그려나간다.”
차소림은 이미 2002년 예컨대 <creation-code> 같은 매력적인 작품을 통해, 에폭시의 여러 레이어 속에서 어렴풋 드러나는 텍스트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마치 오랜 시간의 벽을 뚫고 막 현재에 모습을 드러낸 어떤 통시적인 계시 같아보였다. 작가에게 시간은 하나의 경로로서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의미다. 그것이 역사를 초월하고, 시간을 넘나드는 범우주적 진리, 주어진 하나의 역사적 상황 하에서는 결코 인식되거나 규정될 수 없는 초월적 진리가 존재에게 다가오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이 역사성, 통시성은 바느질을 통해 캔버스에 텍스트를 요철 형태를 남기는 현재의 작업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작가의 최근 작업은 이 신비로운 기호와 텍스트들을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떠 나가면서, 그것의 육화(肉化)를 직접 신체적으로 경험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과정은 성실한 노동의 시간을 요구하지만, 이 시간이 단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해 가는 물리적인 시간인 것만은 아니다. 이 시간은 계시를 갈망하는 예배이자, 그 갈망의 체험 자체를 내면화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것은 실현의 시간이자 기다림의 시간이고, 드리는 시간인 동시에 누리고 소유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나의 계시에서 이웃하는 계시로 연이어지는 이 과정은 작가가 ‘신의 메시지를 향해 지속해 가는 여정’이다. 이것은 완성을 향하면서, 그 자체로 완성이기도 한 매우 신비로운 과정이다.
계시의 이 순환적이고 변증적인 과정이 지속되는 동안, 화면에는 의미의 심오성이 피상성을 결정적으로 넘어선-넘어서고 있는- 흔적인 깊고 오목한 함몰들이 만들어진다. 이 심오함의 출구를 중심으로 텍스들의 응집과 산포가 만들어내는 모노크롬의 변주는 인상적이다. 그것은 마치 고대문명기의 두루마리에서 발굴된 텍스트와 흡사한 인상을 준다. 텍스트의 활자에 해당하는 요소는 지퍼의 서로 맞물리는 잇 날들이 수없이 반복된 조밀한 자국들이다. 이 계시의 심오한 함몰들로 인해 차소림의 회화는 3차원의 깊이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 된다. 형식적으로 이 깊은 함몰은 2차원성이라는 고전적인 지평이 무너질 때의 긴장감을 화면에 남긴다. 물론 이러한 형식주의적 담론이 차소림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에게 회화는 조형적 실험이 전개되는 장 보다는, 신의 계시와 그로 인한 의미의 집결, 그리고 자신의 고백이 융화하는 장에 더 근접해 있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면서, 화면 전체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기도 한 이 함몰들은 계시의 기호학적 응집일 수도 있고, 심오한 초월성으로 나아가는 출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주변에서 개미로 변신한 작가의 갈망이 그토록 분주해 지는 것이리라.
작가가 자신을 개미에 비유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초월적인 여정에서 한 인간의 위상이 결코 과장되거나 포장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개미로의 변신을 단순한 문학적 레토릭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이 성실하고 극소한 곤충이야말로 절대 진리를 향한 초월적 여정에서 자신이 받아들여야 할 정당한 위치이기 때문이다. 화면에서 이 개미들은 지나치게 작아, 가까이 다가서기 전까지는 하나의 얼룩처럼 보일 지경이다. 이 지나치게 작은 것들은 분명 미물(微物)로서, 그들이 살고, 노동하고 이동하는 세계에 대해서조차 거의 아는 것이 없다. 이 절대 무지의 고백이야말로 작가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이 광대한 우주 앞에서 견지해야 할 진정한 태도일 것이다. 우리는 문화적, 시대적, 지형적 제약 속에서 살 뿐이며, 그 차원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바 없다.
하지만 개미들은 그들의 무지 속에서 더욱 열심히 노동한다. 끊임없이 기호들을 옮기거나 축적하면서, 그리고 음미하고 탐닉하면서 운명적으로 그것들을 동반하는 삶에서 분주하게 생을 꾸려나간다. 그러면서, 앞서 말한 계시의 심오한 응집인 함몰들의 주변으로 부단히 모여드는 그것들에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내적 갈망의 방향을 새삼 독해하게 된다.
오늘날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의 범람하는 담론들 안에서 언어는 다만 존재의 한계를 확증하는데 유효한 담론으로 취급되고 있다. 그같은 종류의 담론들을 따르자면, 존재는 사회와 문명의 감옥에 갇힌 것처럼, 언어의 철장에 동일하게 갇혀있다. 언어는 우리를 옴짝달싹하지도 못하게 하는 체계와 권력의 하수인인 것이다. 반면, 차소림에게 언어와 기호는 너무나도 소중한 계시의 신체이자, 드넓고 심오한 초월의 세계로 나아가는 은혜로운 이정표다. 그의 텍스트는 모든 인간 존재가 도달하고자 하는 공통된 갈망의 기록들이다. 이 게시의 보편성을 제한하지 않기 위해 작가는 한 지역의 구체적인 언어를 택하지 않음으로써 그 문자와 텍스트가 한 지역의 방언과는 다른 것이 되도록 했다.
차소림은 우리의 운명적인 제한인 바로 그 언어가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텍스트가 자신으로만 가득 채우는 동안에는 족쇄지만, 자신을 비우는 순간 하나님의 계시를 담는 순결한 용기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향후의 작업들이, 그에게 점 점 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낼 초월과 계시로부터의 메시지를 전하는 성격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작가 자신보다 앞서, 벌써부터 그의 다음과 다음다음의 여정에 함께하고 싶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훨씬 넘어서는 절대로부터 오는 소리를 희미하게나마 듣고 싶기 때문이다.
 
 
 
2004 'message & code' 갤러리 빔 개인전----------------------------------------------------------------------------------------------------


몸을 새겨 넣은 텍스트


이선영(미술평론가)


천을 씌운 패널과 그 위에서 행해진 바느질이 마치 글자가 씌여진 텍스트같은 효과를 주는 차소림의 작품들은 󰡐코드󰡑, 󰡐메시지󰡑, 󰡐소통󰡑이라는 현시대의 화두를 다루고 있다. 이 텍스트들은 석판 위에 새겨진 신성한 말씀처럼 영원히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차소림의 텍스트 위에는 글자형태로 배열되고 얽힌 실을 부지런히 나르는 개미와 그 궤적이 함께 존재한다. 대형 거울 위에 지퍼자국에서 모티브를 얻은 패턴들이 새겨진 작품은 전시장 안 뿐 아니라 갤러리 창문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주변환경이나 자연,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비추어지는 가변적인 공간을 조성한다. 갤러리 내 외부의 공간에서 서로 엇비치는 거울과 유리는 텍스트로 대변되는 인쇄문화의 복제성을 암시하기도 한다.
작가는 작품에 나타나는 글의 이미지가 󰡐우리가 찾아가는 공통코드의 모습이기도 하며, 신의 메시지와도 닮았다󰡑고 말한다. 코드를 만들거나 풀어헤치는 개미들의 모습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만들며 행위를 지속하는 자신의 모습이 투사된 것이다. 1분 57초 분량의 비디오 작품에는 한 땀 한 땀 텍스트를 짓는 작가의 행위가 바느질하는 소리와 더불어 상영된다. 사각사각 울려 퍼지는 바느질 소리에 태아의 심장박동 소리와 태교 음악이 뒤섞여 나온다. 이러한 시청각 이미지는, 곧 출산을 앞두고 있는 작가에게 창조 내지 생산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규칙과 순환을 내포하는 이 근원적인 소리들에 반복과 흔적으로 특징지워 질 수 있는 삶과 창조의 이미지가 겹쳐지고 있다.
여러 겹으로 꿰어진 실들은 반복된 행위 속에서도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그녀에게 바느질은 결코 장식적인 표면 효과에 머무르지 않는다. 바느질을 통하여 새겨진 말이나 글의 이미지는 인간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상징적 교환을 의미한다. 마치 창세기의 신이 언명한 단어들처럼, 그녀의 작품에서 말이나 단어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존재의 새로운 질서를 무(無)로부터 창조하는 상징적 주문󰡑(라깡)이다. 말은 행위를 수행하기도 하고 욕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라깡에 의하면 한 사람의 욕망이 모든 진실을 말로 명확히 드러내는 것은, 욕망과 말의 근본적인 불일치 때문에 불가능하다. 우리는 진실을 모두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완전한 진실을 명확히 드러내려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 반복된 행위를 낳는다.
전시부제인 󰡐message & code'에서, 코드의 사전적인 정의는 수신자와 발신자 사이에 메시지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공통의 규칙, 관습, 규범을 가리킨다. 언어는 광대한 공통규칙이 조합되는 대표적인 코드이다. 차소림은 어떤 구체적인 메시지를 가지는 글자 자체가 아니라, 바느질이라는 반복적인 노동을 통해 글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의미론적 체계를 위한 규칙들을 비유한다. 특히 글자들 사이에서 부지런히 작업하고 있는 듯한 개미들의 궤적은 실을 뭉치거나 푸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메시지의 발신자가 행하는 약호 엮기encoding, 그리고 수신자 쪽에서 메시지를 끌어내는 약호풀기decoding의 과정을 연상시킨다. 코드에 따라 메시지를 만드는 조작에는 이렇게 의도와 해독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불규칙한 형태로 얽혀 있는 실뭉치들은 동시에 완전한 소통에 대한 불가능성을 암시한다. 발신자든 수신자든 코드의 기능 전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메시지는 부분적으로 소통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소통의 장애는 텍스트의 창조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차소림이 만들어내는 모종의 기호체계는 텍스트이다. 그것은 기호들이 어떤 코드를 통해 통일성을 이룬 체계이다. 인간은 의미작용의 체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는 그 자체가 텍스트로 나타난다. 차소림의 작품은 텍스트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거울이나 비디오와 결합된 작품에서 보여지듯, 수행성이라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열린 과정을 통해 텍스트는 저자의 의도를 넘어서 독자의 생산이 가능해지고, 기호의 무한한 놀이가 행해지며, 의미가 산출된다.
월터 옹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 인간의 의식을 형성하고 인간의식을 고도 기술문화로 향하게 하고 이끌어간 문자성literacy이라고 지적한다. 인간에게 문자가 내면화됨으로서 인류는 세계와 사고에 대한 분석이 가능해졌다. 모음이 섞인 단어처럼 일정한 길이로 잘려진 차소림의 문자 이미지는 음성이라고 하는 붙잡기 어려운 세계를, 추상적이고도 분석적인 그리고 시각에 호소하는 모습으로 코드화 한다. 문자를 쓸 때의 차이와 반복의 경험이 차소림의 작품에도 내재되어 있으며, 문자와 추상적인 시간의 틀과의 관계도 드러나 있다. 차소림의 문자이미지는 그 동안 그녀가 사용해 왔던 재료인 지퍼의 금속파편이나 여러 겹의 실같은 두툼한 물질성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문자 이미지는 단순히 소리의 기록된 표상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의 물질적인 근거이다. 라깡에 의하면 글은 상징계를 떠받히고 있는 물질적인 기질(실재계)과 관련되는 것이다. 실재계의 한 요소로서 글이란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다. 글이란 본질적으로 국지화 된 기표의 구조이다. 차소림의 문자는 우리가 일반 언어처럼 해독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은 나름의 의미화의 체계로 조직되어 있다. 라깡에 의하면 기표는 주체의 운명을 표시해 주고 주체가 해독해야 하는 의미 없는 글로 존속된다. 글은 본질적으로 회귀하고 반복되는 그런 것이다. 글은 그 자체를 주체의 삶에 끊임없이 새겨 넣으려고 한다. 작가에게 󰡐쓰기󰡑는 자신의 삶에 통일성을 부여해 주는 것으로서 중요하다.
쓰기를 중시함으로서 말하기 중심의 소통 중심을 전복하려 했던 현대 철학자 데리다는 말에 앞서 글이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여기에서 글은 문자적인 글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의 물체들이 사람의 심리에 인상을 주는 인각(印刻) 작용을 가리킨다.(조셉 칠더즈 편 [현대문화 사전] 참조) 차소림에게 코드는 부드러운 것에 파고들면서 짜맞추어 지는 지퍼의 이미지로 나타나곤 한다. 그것은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문자의 인각 작용과 관련되어 있다. 사회적인 동물로 알려진 개미들에 의해 부지런히 엮여지고 풀어지는 문자 이미지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형성하는 어떤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것은 서로 연결된 실처럼 일련의 맥락을 통해서만 존재하지만, 때로 풀 수 없을 만큼 뒤얽히고 고립되기도 한다. 그것은 의미가 안정성과 고정성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지연, 대리보충, 대치󰡑(데리다)와 관련되는 것임을 알려준다. 이러한 불안정성을 통해 단순한 소통을 넘어서는 예술적 글쓰기가 시작된다. 매끄럽기보다는 굴곡이 심한 텍스추어를 가지는 차소림의 문자이미지는 단선적인 서술을 넘어서, 다양한 표면을 이루고, 관객은 그 복잡한 굴곡들을 추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차소림의 문자이미지는 문자성이라는 인류학적이고 기호론적인 메시지의 차원과 작가로서의 글쓰기라는 경험에 더하여, 여성으로서의 글쓰기라는 경험이 포함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태아의 심박동소리와 바느질 소리가 어우러지는 비디오 작품에서 더욱 분명하다. 그녀에게 󰡐글쓰기󰡑라는 것은 여성의 몸과 깊이 관련이 되어 있다. 엘렌 식수는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해서 글을 쓴다고 주장했다. 여성적 글은 가부장제의 이항 대립적 제한성을 초월한다고 평가된다. 크리스테바는 이 언어가 상징이 정착되기 이전의 미지의 대륙이 유아적인 신체에서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어둑한 전시장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동시적이고 다원적인 소리, 그리고 끝없이 움직여지는 바늘은 동시성, 다원성, 그리고 이동성이라는 여성적 언어의 특징을 보여준다.
현대의 페미니스트들은 글에 여성성feminity을 새겨 넣고자 하는 충동이 지배적 문화에서 아직 언어가 없는 것을 위한 글쓰기이고, 남성적인 상징계 속에서 주변화 되고 침묵 당한 것을 쓰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차소림의 작품에서 바늘과 바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과 틈새에서 생산되는 텍스트는 아직 생각되지 않았던 것을 쓰는 방식과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관습적인 글쓰기보다는 어머니의 목소리와 육체와 리듬에 더 가까운 언어이다. 그 공간으로부터 여성적인 차이와 욕망이 창조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녀의 바느질은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에 육체를 새겨 넣는 것으로서, 정신과 육체의 구분을 비롯한 모든 이원론을 부정하고 있다.
A text in which the body is carved


Lee Sun-young
An art critic


Cha So-lim's work in which a panel covered with cloth and sewing on it have the same effect as texts in which letters are written deals with the topics of modern times such as 'code', 'message' and 'communication'. The texts are not eternally fixed like the Holy Word carved on a lithograph. What coexist on her texts are ants diligently carrying the entangled threads arranged in the form of letters and their traces. The work where the patterns were carved whose motive originated from the traces of a zipper on a large mirror can be seen not only in the gallery but also through its windows. It creates changeable space in which the surrounding environment or nature, and all people are reflected. The mirror and glass reflecting obliquely each other in the internal and external space of the gallery also suggest that printing culture a text speaks for is duplicated.
The artist says that the text image in her work 'reflects a common code we search for and resembles God's message.' The artist herself who continues to make and do something is projected on ants making or dissolving codes. The one-minute and thirty-four-second video work shows her act of producing a text stitch by stitch with sewing sound. There is a mixture among sewing sound spreading crisply, a fetus's heartbeat and music for him or her. The audio-visual images have the artist expecting a baby chew over the meanings of creation or production. The images of creation and life characterized by repetition and traces are overlapped on these fundamental sounds including rules and circulation.
There is a fine difference even in the repeated act of running a thread several times. Sewing has no ornamental and superficial effect on her. The image of speech or texts carved through sewing means the symbolic exchange of interconnecting human beings. Just like the words declared by God in Genesis, the speech or words in her work are 'a symbolic incantation of creating a new order of existence from nothingness' in the human relationships (Lacan). Speech performs an act or reveals a desire. But Lacan says that it is impossible because of the fundamental discrepancy in desire and speech that one man verbally clarifies all the truths of his or her desire. We cannot tell all truths. The irrealizable desire to clarify perfect truth gives birth to a repeated act.
By lexical definition, 'a code', included in‘message & code' which is the subtitle of the exhibition, refers to common rules, customs and norms which enable a message to be communicated between a sender and a receiver. A language is a typical code in which a wide range of common rules are associated. The artist produces the images of texts not through letters themselves with some concrete message but through the repeated labor of sewing. The images compare the rules for semantic systems. In particular, the traces of ants as if to diligently work between letters look like the act of uniting or untying threads, which reminds us of the processes of encoding by a sender of a message and decoding by which a receiver understands it. The manipulation of producing a message according to codes includes the processes of intention and decoding.
Bundles of threads entangled in irregular forms suggest the impossibility of simultaneously perfect communication. Since either a sender or a receiver cannot know the whole function of a code, a message cannot but be partially communicated. Of course, such hindrance of communication is also revealed as the creativity of a text. A certain kind of sign system produced by the artist is a text. It is the system where signs are unified through a code. The world itself is expressed as a text because man cannot exist away from the system of semantic action. The artist's work with the structure of a text includes the process of performance as shown in the work combined with a mirror or a video. Such open process allows a text to be produced by readers beyond the author's intention, have signs played infinitely, and produce meanings.
In Oral and Written Cultures Walter Ong points out that it was literacy that formed human consciousness and directed and led it to highly technological culture. By internalizing character the mankind can analyze the world and thinking. With the character image cut regularly like a word with mixed vowels the artist makes voice, that is, the world that is difficult to grasp an abstract, analytical code appealing to the sense of sight. The experience of differences and repetitions in writing characters is internalized in her work, which also reveals the relation between character and the frame of abstract time. Her character image is expressed as pieces of metal in a zipper, the material used by her in the meantime, or rather thick material like threads in many folds.
Here, the image is not simply a recorded representation of sound, but the material ground for a language itself. Lacan says that a text is related to material substrate(the real) supporting the symbolic. As one element of the real, it is itself meaningless. It is the structure of a signifier localized essentially. Her characters cannot be decoded in the same way as a general language, but are organized in their own semantic systems. Lacan says that a signifier indicating the fate of the subject continues as a meaningless text that the subject should decode. A text is essentially regressed and repeated. It continues to try to carve itself in the life of the subject. To an author 'writing' is important because it provides unity for his or her own life.
Jacque Derrida who is a modern philosopher trying to overthrow speaking-oriented communication by attaching importance to writing asserted that writing preceded speaking. Writing, here, does not mean literal writing, but an impression that the objects in the external world makes on human psychology (See A Dictionary of Modern Culture compiled by Joseph Childers). The artist would express a code as the image of a zipper assembled cutting into soft things. Whether it has positive or negative meaning it is related to the impression of character. The character image diligently woven and untied by ants known as social animals is forming our perception of the world in a style.
It exists only through a series of contexts like interconnected threads, but is also entangled and isolated to the extent that it cannot be untied. It is informed that its meanings are related to 'delay, supplement and replacement' (Derrida) rather than to stability and fixedness. Through such instability artistic writing begins beyond simple communication. The artist's character image with a bendy texture rather than with smoothness forms various surfaces beyond lineal description, and spectators track the complex bends. Finally, I want to point out that it includes the experience of writing as a woman in addition to the level of an anthropological and semiotic message called literacy and the experience of writing as an author.
It is clearer in her video work where a fetus's heartbeat is mixed with sewing sound. To her 'writing' is deeply related to a woman's body. Elen Siksu maintained that a woman writes through her own body. A woman's writing is evaluated to transcend the limitation of binomial opposition in patriarchical system. J. Kristeva pointed out that an unknown continent before the symbols of this language settled could come from the infantile body. The simultaneous and plural sound spreading silently in the dark pavilion and the endlessly moved needle show the characteristics of a female language such as simultaneity, plurality and mobility.
Modern feminists evaluate that the impulse to carve feminity in a writing results from the writing for no language in a dominant culture and from the writing about being made silent mainly changed in the masculine symbolic. In her work a text from the gap between two needles is related to a method of writing what has not been thought of yet. The language is closer to a mother's voice, body and rhythm than to customary writing. A woman's differences and desires can be creatively expressed from the space. Her sewing carves the body in the world composed of texts, and denies every dualism including the division of spirit and body.